15년 전. 20대 초의 파릇한 나. 친구들에게 말했다.
"롤이나 하러 가자"

10년 전. 아직 젊었던 나. 직장 동료들에게 말했다.
"롤이나 하시죠"

5년 전. 유부남이 되어버린 나. 옛 친구들에게 말했다.
"협곡은 좀 그렇고 칼바람이나 하자"

그리고 지금. 불혹을 목전에 둔 나. 애 깰까봐 마이크도 못 쓰는 친구들에게 말한다.
"증바람 ㄱ?"


리그 오브 레전드 League of Legend : Clash of Fates
©INVEN

현역이긴 하지만, 사실 옛날 게임이다. 군 시절 당직 서다 몰래 접속한 공군 인트라넷에서 처음 본 리그오브레전드가 이렇게까지 나와 오래 갈 줄 누가 알았겠나. 스타크래프트의 뒤를 이어 2차 민속놀이가 되어가는 게임이지만, 아직도 재밌다. 왜? 흔히 '증바람'으로 부르는 '무작위 총력전: 아수라장'이 있으니까.

예전처럼 판단이 빠르지도, 손이 자유자재로 움직이진 않지만, 증바람은 이길 수 있다. 필요한 건 게임 이해도와 약간의 운. 랜덤으로 떨어지는 증강을 조각 맞추듯 기워 특이점이 오는 순간, 협곡을 휩쓸던 20대 초반의 전능감이 다시 찾아온다. 다 덤벼, 나 신주환무 헤카림이야 어?

1차 대격변은 솔직히 그냥 그랬다. 신기한 증강이 많아지긴 했지만, 세트 시스템의 도입은 혼돈의 게임인 증바람조차 '정석 빌드'를 만들어버렸다. 시종일관 눈덩이만 굴려대는 판이나, 평타 한 방 맞으면 미사일이 죽을 때까지 날아오는 판은 솔직히 좀 의욕이 꺾였다.

그리고, 2차 대격변이 찾아왔다. 세트 시스템 삭제, 스킬 강화 증강의 도입. 업데이트 적용도 전에 테스트 서버의 수많은 간증이 유튜브를 장식했다. 그랩을 다섯 개씩 쏘는 블리츠크랭크, 한 번 뜨면 죽을 때까지 못 내려오는 에어본. 기대가 불타올랐다. 1절 넘어 2절, 그 넘어 뇌절 정도는 되어야 늙은 게이머도 승리를 엿볼 수 있는 거다.

리그 오브 레전드 League of Legend : Clash of Fates
그레이브즈 궁이 여러 개 나간다고..?©INVEN

뭐야 생각보다 뇌절이 없잖아?


10일, 패치가 되자마자 게임에 접속했다. 두근두근, 어떤 뇌절이 날 반겨줄까? 아니나 다를까, 게임을 시작하자 마자 스킬 강화 증강들이 날 반긴다. 여러 번 맞춰 퀘스트를 달성하면 피해량이 올라가거나, 쿨다운이 줄어드는 증강, 구속기 특화로 적을 구속할 때마다 회복하는 증강, 대망의 멀티샷까지.

내 캐릭터는 최근 스태틱 AP빌드가 떠오르며 좀비전사가 되어버린 베트남의 안녕하세요 '신 짜오'. 첫 증강은 e스킬의 가속 추구다. 효과가 뭐냐고? e스킬을 여러번 맞출 때마다 스킬 쿨이 대폭 줄어든다. 일단 붙어야 뭐든 하는 짜오이니 합리적인 선택이다.

그런데 아뿔싸? 버그가 있다. 이상하게 퀘스트가 카운트가 안된다. w를 맞추고 달려들어도, 그냥 맞춰도 퀘스트 카운트가 안 오른다. 그렇게 난, 첫 증강을 버리고 시작했다. 여차저차 이기긴 했지만, 생각보다 스킬 증강이 그리 큰 영향을 주진 않았다.

다음 판, 같은 편에 있던 말파이트가 선택지를 고민했다. AP말파이트의 국밥 증강들인 '유레카'와 '궁극의 각성'. 그리고 남은 하나는 e스킬을 쓸 때 앞으로 돌진하는 '날쌘 걸음'. 국밥과 미지의 재미 중 사이에서 갈등하던 말파이트는 재미를 선택했고, 이후 1분이 채 지나지 않아 외쳤다. "이거 쓰레기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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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 써 보더니 '쓰레기다'라는 평을 남긴 말파이트의 날쌘 걸음 ©INVEN

생각보다 함정이 많다. 그렇게 스무 판 가까이 게임을 하다 보니 문득 깨달음이 왔다. 이거, 생각보다 특이점이 잘 안 나온다. 이전에 비하면 상당히 순한 맛이 됐다.

스킬 증강 자체는 꽤 재밌고 강력한 효과들을 지니고 있지만, 그게 기존 증강 대비 무척 강하냐 하면 그건 아니다. 말파이트는 날쌘 걸음보다 유레카나 궁극의 각성을 가는게 훨씬 셌을 거다. 내 신 짜오도 가속 추구가 아닌 다른 증강을 갔으면 더 효과적이었을 수도 있겠다.

물론, 굉장히 효과적인 경우도 없지는 않다. 가뜩이나 스턴 걸기 쉬운 신드라가 스턴 걸 때마다 체력이 차는 '굶주린 속박'을 가니까 딜교환이 성립이 안 되더라. 하지만, 그 정도다. 그랩 멀티샷을 선택한 블리츠크랭크가 좀 빡치긴 했지만, 그냥 그랩 잘 쏘는 친구라 생각하면 뭐 이해할 수 있으니까. 엄청나게 강한 증강이 더해진게 아닌 상태에서, 세트 시스템만 빠졌다 보니 오히려 1차 대격변에 비하면 꽤 밋밋한 게임이 펼쳐진다.

리그 오브 레전드 League of Legend : Clash of Fates
그냥 봐도 별로 좋아 보이진 않아 ©INVEN

때문에, 유튜브 쇼츠에서 나오는 '특이점 뇌절'을 보기가 쉽지 않다. 기존의 세트 시스템 대부분이 별도 증강으로 빠졌기에 아예 없어진 건 아니지만, 그만큼 선택 가능한 증강의 수가 줄어드니 강력함에도 상한선이 걸렸다. 1차 격변때와 비교하면, 불합리가 줄어들었지만 그 만큼 미칠듯 강해지기도 쉽지 않다. 증강이 딱딱 맞아 떨어지면 가능하지만, 선택지가 늘어난 만큼 경우의 수도 많아지니 그조차 쉽지 않다.


생각보다 드물고 늦게 오는 특이점, 느려진 템포


이런 변화로 인해, 게임 템포가 상당히 느려졌다. 이전엔 빠르면 2코어가 나오기 전에 특이점이 찾아오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이전의 플레이가 불가능해진 건 아니다. '천천히, 꾸준히' 제이스는 아직도 가능하다. 하지만 증강 선택지가 늘어나니 '천천히, 꾸준히'가 등장할 확률도 낮아졌고, 세트 시스템이 없으니 데굴데굴 + 핀볼의 초살 눈덩이도 예전만 못 하다.

리그 오브 레전드 League of Legend : Clash of Fates
이런 묘한 애들이 골드 증강 파이를 다 먹으니 좋은 증강 뽑기가 더 힘들어졌다 ©INVEN

하고자 하면 할 수 있겠지만, 그 사이 허들이 많아졌고, 한다 해도 예전만큼 강하지는 않다. 이 변화가, 전체적인 게임의 템포 변화를 불러왔다. 증바람을 좀 해본 이들이라면 알겠지만, 이전에는 뭘 해도 뒤집을 수 없는 상황이 있었다. 도박꾼을 기가 막히게 뽑아 증강도 세고 무한히 강해지던 적이라던지, 강철심장 한 방에 죽는 탱크엔진 문도같은 것들 말이다.

이런 녀석들이, 굉장히 드물게 나온다. 달리 말하면, 내가 그렇게 강해지기도 쉽지 않다. 앞서 말했듯 이 그림같은 증강 조합을 맞추기도 굉장히 어려워졌을뿐더러, 세트 시스템이 사라져서 기존 세트 효과를 받으려면 증강 한 칸을 소모해야 하니 말이다.

이에 평균 게임 시간도 꽤 늘어났다. 평균적으로 이전보다 체감상 2~3분은 늘어난 느낌이다. 적이 엄청 강한 경우가 드무니 15레벨 전에 기가 꺾여 항복하는 경우가 잘 없고, 반대로 아군도 그렇게 강해지기 쉽지 않으니 적이 게임을 포기하는 경우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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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몰랐지 이 게임이 26분까지 가서 쉔 트리플킬로 끝날줄... ©INVEN

여기에 한 가지 달라진 양상으로, '탱커'를 픽하는 게이머들이 더 많아졌다. 이전에도 증강 잘 받은 탱커들은 불멸자에 가까웠고, 상대 딜러가 특이점이 와 버리면 존재감이 확 사라지는 건 똑같지만, 일단 재미가 늘었다. 스킬에 의존하던 탱커는 '가속 추구'로 쿨다운을 확 줄일 가능성이 생겼고, '날쌘 걸음'이나 '자비의 일격'등으로 거리감을 좁힐 수 있는 방법이 늘어나다 보니 탱커 자체가 이전보다 더 재밌어졌다. 압력솥을 끝까지 키운 문도를 아시오? 겁나 쎕니다.

여튼, 전체적인 파워 레벨이 다운되면서 게임 흐름도 루즈해졌지만, 이전보다 균형은 더 잘 맞아떨어진다. 어느 하나가 너무 강해져서 게임을 터뜨리는 경우도 줄었고, 너무 일방적으로 경기가 진행되어 중반이 가기 전에 한 팀이 항복하는 경우도 줄었다. '아수라장 세트2'를 다 해금하면 또 다를 수 있겠지만, 일단 지금의 변화상은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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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잘만 맞으면 예전처럼 강해지는 것도 불가능하지 않다. 좀 어려워졌을 뿐 ©INVEN


그래도 재밌다. 그게 증바람이니까.



최초의 증바람이 신선했고, 1차 업데이트가 여기에 변주를 주었다면, 2차 업데이트는 안정을 줬다. 뭔가 새로운게 엄청나게 많이 생겨 개판이 날 줄 알았건만, 세트 효과가 별도 증강으로 빠져 버리면서 강함의 상한선이 낮아지는 바람에 일방적인 게임이 잘 나오질 않는다.

"그렇다면 재미가 없어진 건가요?"라고 묻는다면, 그건 또 아니다. 여전히 증바람은 재밌다. 혼자 다섯 명을 다 때려잡는 '이김으로서의 재미'는 이전만 못 하겠지만, 변수가 늘어난 만큼 게임 내에서 특정 상황이 만들어지며 생기는 재미는 이전보다 가짓수가 늘어났다. 죄다 이동속도가 빨라지는 중반이 넘어가면 존재감이 사라지던 '니달리'도 창을 폭격하듯 흩뿌릴 수 있어 활용도가 늘어났고, 마찬가지로 중반이 넘어가면 다소 활약이 미미하던 '서포터'들도 '격려하기'나 '영혼 폭탄'등의 증강으로 활용도가 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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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프리즘 증강이 되어버린 '도박꾼'. 이제 챔피언을 잡아도 나온다 ©INVEN

어거지로 만들어야 좀 쓸만했던 한방 툭 때리는 Q베인이나 어퍼컷 블리츠는 '꽁!'의 등장으로 실전성을 갖췄으며, 돌진기 쿨다운을 줄일 방법이 생긴 뚜벅이들은 이전처럼 일방적으로 두들겨맞지 않고 반격을 할 원동력을 얻었다.

패치되고 이제 하루. 아직 나도 연구가 많이 부족하다. 증바람이 그렇다. 1천 판은 진작에 돌파했지만, 여전히 생소하거나 생각치 못했던 빌드들이 간혹 보인다. "뭐가 저래 세?"하고 탭 키를 눌렀다가 깨달음을 얻는 경우도 적지 않다.

지금이야 이전 대비 조금 더 안정되고, 완만해진 변화로 보이지만, 몇 주가 지나면 또 모른다. 생각도 못했던 사기 빌드들이 발굴되면서 이전처럼 뇌절 대잔치가 벌어질지 누가 알겠나? 그럼에도 변하지 않은 건, 여전히 재미있다는 거다.

10대도 재밌고, 20대도 재밌고, 30대 후반인 나도 재밌고, 심지어 40이 넘은 직장 동료 부부도 밤마다 증바람을 한다. 남녀노소 즐기는 우리의 변칙 민속놀이.

강철심장 탱크엔진 드롭킥 렛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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