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대로 만든 패러디는 무언가를 향한 애정을 표현하는 가장 날카롭고 유쾌한 방법이다. 박쥐 분장을 하고 늘 진지한 태도를 고수하는 남자가 그 대상이라면, 패러디는 훨씬 더 쉽고 풍성해지기 마련이다. 레고 시리즈 개발사인 TT 게임즈는 이미 이런 작업에 능숙하다. 이들은 과거에도 여러 차례 고담 시를 무대로 삼았고, 지난 20년 동안 대중문화에서 가장 사랑받는 캐릭터들을 유쾌하게 패러디해 왔다. 이번 신작 '레고 배트맨: 레거시 오브 더 다크 나이트'에서 그들은 다시 한번 최고의 기량을 뽐낸다. 재미를 최우선으로 삼아 블록 하나하나를 정성껏 쌓아 올렸으며, 특히 일직선 진행 방식의 스테이지를 뛰어넘는 훌륭한 오픈 월드를 구현해 냈다. 락스테디의 '배트맨: 아캄' 시리즈를 재치 있게 비틀어 낸 요소들 역시 성공적으로 작동한다. 이 게임은 '망토 두른 십자군'을 향한 최고 수준의 레고 게임이자 애정 어린 헌사다.
이번 작품은 역대 시리즈 중 레고 블록이라는 소재의 특성을 가장 잘 살렸다. 여러 종류의 배트맨 레고 조립 세트를 바닥에 쏟아부어 마구 섞은 뒤, 완전히 새로운 형태로 다시 조립한 듯한 구조를 띠고 있기 때문이다. TT 게임즈는 '브루스 웨인'이 등장했던 역대 영화들의 핵심 줄거리를 가져와, 팬들이 사랑하는 명장면들을 플라스틱 블록으로 엮어 자신들만의 이야기를 만들었다. 예를 들어 첫 번째 챕터에서는 팀 버튼 감독의 1989년작 영화 '배트맨'에서 잭 니콜슨이 연기한 '조커'의 탄생 장면과, 맷 리브스 감독의 영화 '더 배트맨'에 등장한 팔코네 가문 중심의 '아이스버그 라운지' 잠입 작전이 아주 자연스럽고 유쾌하게 하나로 합쳐진다.
이 게임은 원작 영화들을 존중하면서도, 동시에 그 내용들을 마음대로 섞고 비틀어 예상치 못한 조합을 쉴 새 없이 보여줄 때 가장 빛난다. 초반 사건들과 등장인물들이 너무 뒤늦게 하나로 묶이는 바람에 전체적인 서사의 완성도는 기대에 조금 못 미칠 수 있다. 하지만 영화들을 재미있게 재해석한다는 점에서는 목표를 완벽하게 달성했다. 하나의 거대하고 장엄한 이야기라기보다는, 6개의 챕터 각각이 독자적인 미니 코믹북 시리즈라고 생각하는 편이 좋다. 각 챕터마다 새로운 동료들이 '배트맨'의 곁에서 유명 악당들의 계획을 저지하기 위해 싸운다. 이를테면 일련의 임무를 수행하다 보면 가죽 의상에 대한 집착이 덜해진 영화 '배트맨 리턴즈' 스타일의 '펭귄' 이야기를 만나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뜬금없이 '컨디먼트 킹' 같은 악당과 싸워야 하는 식이다. 익숙한 영화의 흐름에서 벗어나는 이런 순간들이야말로 가장 큰 즐거움을 선사한다. 특정 장면이 어떻게 패러디될지 다 안다고 생각했을 때, 엉뚱하고 유쾌한 전개로 허를 찌르는 방식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플레이어는 약 20개의 스토리 미션을 통해 고담 곳곳을 돌아다니며 전투, 퍼즐, 플랫폼 액션을 경험하게 된다. 기존에 레고 게임을 해본 적이 있다면 아주 익숙한 방식일 것이다. 하지만 전투 시스템은 완전히 다르다. 락스테디의 아캄 시리즈에서 영감을 받아 반격과 회피 중심의 근접 전투를 도입했기 때문이다. 물론 타격음은 만화책에서 튀어나온 듯한 과장된 소리들로 채워져 있다. 적의 머리 위에 번쩍이는 아이콘이 뜰 때마다 쳐내기 버튼을 누르며 수많은 범죄자를 쓰러뜨리고 100단위의 콤보를 쌓아가는 과정은 꽤나 매끄럽고 훌륭하다. 적들이 산산조각 날 때까지 그저 공격 버튼만 연타하던 기존의 레고 게임 방식에서 한 단계 발전한 셈이다. 적의 종류도 제법 다양해서 전투가 지루해지지 않게 막아준다. 다만 적들이 배치되는 방식이나 전투 상황 자체를 좀 더 흥미롭게 설계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은 남는다.
전투 상황에 접근하는 방식을 스스로 고민하게 만드는 요소가 더 많았다면 좋았을 것이다.
나는 기존 레고 게임의 클래식 난이도보다 한 단계 높은 망토 두른 십자군 난이도로 플레이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 전투에서 패배할 뻔한 위기는 단 한 번도 없었다. 물론 TT 게임즈가 애초에 고난도의 도전을 염두에 두고 만든 게임은 아닐 것이다. 원한다면 그것에 근접한 다크 나이트 난이도를 선택할 수도 있다. 그렇다 해도 전투를 어떻게 풀어나갈지 조금 더 고민하게 만들었다면 어땠을까. 은신 암살은 너무 쉽게 성공하고, 난전 상황 역시 게임 초반에서 크게 발전하지 않는다. 전투는 대부분 사방이 막힌 구역에서 구르고 뛰며 밀려오는 일반 적들을 처리하는 식이다. 여기에 덩치 큰 적이나 원거리 저격수가 가끔 섞여 나오는 정도다. 총 7명으로 구성된 플레이어블 캐릭터들의 기본 전투 조작감이 모두 똑같다는 점도 아쉽다. '나이트윙'부터 짐 고든까지 타격감이 완전히 동일하다. 전투 동작이나 고담 시를 이동하는 방식에서 캐릭터마다 조금 더 차별화를 두었다면 좋았을 것이다. 각자 날개나 글라이더를 장착하고 있지만 조종하는 느낌은 전부 같다. 그래도 갈고리를 걸고 공중으로 솟구쳐 오르는 활공의 손맛 자체는 훌륭해서 크게 불만을 가지긴 어렵다.
캐릭터 간의 차이는 장비에서 드러난다. 배트 패밀리 구성원들은 각자의 벨트에 두 가지의 고유한 도구를 지니고 있다. 예를 들어 레이저 포인터를 재빨리 비춰 '캣우먼'의 고양이 친구들이 적의 얼굴을 할퀴게 만들거나, '배트걸'의 드론을 소환해 뭉쳐 있는 적들을 전기로 기절시키는 과정이 무척 즐거웠다. 또한 모든 캐릭터는 고유의 스킬 트리를 가지고 있다. 연속 공격으로 집중력 게이지를 채우면 사용할 수 있는 재미있는 궁극기들도 해금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 가장 마음에 들었던 것은 '배트랭'을 활용한 배트맨의 기술이었다. 박쥐 떼를 소환해 다수의 적을 공격하는데, 플라스틱 날개와 이빨이 휘몰아치는 속에 적들이 갇혀 기절하고 피해를 입는 연출이 일품이다. 수백 명의 캐릭터가 등장하던 기존 레고 게임들에 익숙해져 있다 보니, 처음에는 조작 가능한 영웅의 수가 적은 것이 이 게임의 단점이 되지 않을까 걱정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캐릭터마다 스킬 포인트를 투자해 개성을 살릴 수 있을 만큼 육성의 깊이가 충분히 확보되어 있다.
캐릭터들의 고유한 능력은 전투보다는 퍼즐을 풀 때 가장 잘 드러난다. 각 스테이지는 문제 해결과 전투가 훌륭하게 섞여 있다. 머리를 쥐어짜야 할 만큼 어려운 수준은 아니지만, 진행하다가 한 번씩 멈춰 서서 생각하게 만든다. 임무 도중 고정된 두 캐릭터를 언제 교체할지 파악하는 것이 해결의 핵심이다. 화학 물질이 뿜어져 나오는 파이프를 고든의 거품 대포로 막을지, 아니면 셀리나 카일의 고양이를 좁은 환풍구로 들여보낼지 판단해야 한다. 거의 모든 레고 게임이 그렇듯, 이 게임 역시 2인 로컬 협동 플레이를 지원한다. (온라인 플레이를 지원하지 않는 점은 아쉽다.) 일부 퍼즐은 두 플레이어 간의 타이밍과 협력이 필수적이다. 여러 장비를 사용할 때 등장하는 미니 게임들도 쏠쏠한 재미를 준다. 배트걸의 해킹 배트랭을 쓰면 동심원 미로에서 적을 피하는 짧은 퍼즐이 시작되는 식이다. 게임이 진행되어도 미니 게임의 난이도가 크게 올라가지는 않지만, 종류가 제법 다양해서 같은 퍼즐을 지루하게 반복한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영화 '배트맨 비긴즈'의 그림자 동맹 훈련을 패러디한 초반 튜토리얼은 기본기를 익히는 데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려 흐름을 뚝뚝 끊는다. 하지만 그 구간을 지나면 이내 안정적인 리듬을 찾고, 후반부로 갈수록 게임의 재미가 절정에 달한다. 특히 후반부에 등장하는 영화 '다크 나이트'의 트럭 추격전 패러디가 백미다. 차량 탑승과 맨몸 액션이 역동적으로 전환되며 짜릿함을 선사한다. 이전 미션들에서는 부족했던 속도감과 박진감이 제대로 살아있다. 미션을 설계할 때 이런 연출을 더 많이 넣었으면 어땠을까. 이렇게 다양한 요소들이 완벽하게 어우러지며 게임의 진가가 발휘될 때 그 재미는 이루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레고 게임을 할 때마다 나의 가장 큰 즐거움은 메인 스토리에 있지 않았다. 샛길로 빠져 오픈 월드를 탐험하고 숨겨진 수집품을 찾아다닐 때야말로 레거시 오브 더 다크 나이트의 진짜 매력이 드러난다. 고담 곳곳에는 찾아내야 할 것들이 넘쳐난다. 이번 작에 구현된 범죄의 도시가 규모 면에서 역대 최대는 아닐지 몰라도, 탐험할 거리는 꽉 들어차 있다. 지역마다 부수고 다닐 수 있는 수백 개의 스킬 토큰 상자와 악당 테마의 트로피들, 그리고 꽤나 복잡한 '리들러'와 '클루마스터'의 퍼즐까지 준비되어 있다. 높은 건물 지붕부터 으슥한 골목길까지 어느 곳을 가든 항상 즐길 거리가 가득하다.
메인 스토리와 무관한 배트맨 세계관의 악당들을 만날 수 있는 연계 서브 미션들도 존재한다. 예를 들어 웨일런 존스 사건을 해결할 때의 경험은 정말 훌륭했다. 나는 세계 최고의 탐정이 되어 원자와 모양을 맞춰 화학 물질을 분석하고, 자외선 라이트로 흔적을 추적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캣우먼이 팔코네 가문의 재산을 추적하는 서브 미션 역시 소규모 금고 털이와 도둑질의 재미가 쏠쏠하다. 방식이 너무 복잡하지 않으면서도 게임 플레이를 다채롭게 만들어주어 세계관에 더욱 몰입하게 해준다. 레거시 오브 더 다크 나이트는 플레이어를 계속 바쁘게 만들지만, 그 과정이 결코 단순 노동이나 귀찮은 숙제처럼 느껴지진 않는다. 정확히 12시간 만에 메인 스토리를 끝냈을 때 수집품 진행도는 53%가 남아있었지만, 이후 탐험을 계속해 34시간 만에 100% 달성에 성공했다.
임무 완수에 따른 보상도 다양하다. 특정 임무를 깨면 슈트나 차량, 겉모습을 바꿔주는 꾸미기 소품용 레드 브릭을 얻을 수 있다. 캐릭터 수가 적어서 실망했던 플레이어라도, 해금할 수 있는 복장이 100가지나 된다는 사실을 알면 위안이 될 것이다. 원작 코믹스 팬들을 위한 클래식 복장부터, 취향에 따라 고를 수 있는 독특한 라임색의 방사능 폐기물 테마 배트맨 닌자 외형까지 준비되어 있다. 임무를 깨는 것 외에도, 도시 곳곳에 있는 '뱃 마이트'의 상점에서 그동안 열심히 모은 재화(스터드)를 사용할 수 있다. 그는 마치 섬 생활을 청산하고 춥고 어두운 고담으로 이사 온 동물의 숲 상인 같은 느낌을 준다. 물건을 고르는 동안 제4의 벽을 넘나드는 메타적인 농담을 던져 웃음을 자아낸다. 복장 외에도 '배트케이브'를 꾸밀 수 있는 장식품들을 판매하는데, 이는 배트맨 팬들에게 전에 없던 만족감을 선사한다. 비밀 기지를 감상하는 것 자체로도 무척 즐겁다. 수집한 전리품들이 거대한 옷장이나 전시 공간에 자신이 원하는 대로 멋지게 진열되기 때문이다.
눈을 돌리는 곳마다 매력이 넘쳐흐른다.
게임을 하다 보면 눈을 돌리는 곳마다 매력이 넘쳐흐른다. 컷신은 항상 몸개그와 엉뚱한 대사를 통한 유쾌함을 최우선으로 삼아 큰 웃음을 준다. 한 번은 화려한 놀이공원 볼풀장에서 멍이 들도록 적들을 두들겨 패고 있었는데, 한 녀석이 "우린 건강보험도 없지만, 이 정도면 보상은 톡톡히 받겠네!"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리기도 했다. 이 게임에는 배트맨을 향한 깊은 애정이 깔려 있다. DC의 상징적인 영웅과 그를 둘러싼 문화 전체를 향해 애정 어린 농담을 던진다. 마이클 케인의 유명한 트위터 오타 밈을 패러디한 부분도 있고, 그저 배트케이브를 조용히 돌아다니고 있을 뿐인데 뜬금없이 전화가 울리기도 한다. 수화기 너머엔 누가 있을까? 바로 '베인'이다. 코미디 드라마 '뱀파이어에 관한 아주 특별한 다큐멘터리'의 배우 맷 베리가 목소리를 맡았는데, 환상적으로 유치한 장난 전화를 걸어오는 그의 연기가 일품이다.
1989년 영화 '배트맨'에 등장한 조커의 화려한 퍼레이드부터 플라잉 그레이슨 서커스단의 위험천만한 불기둥 장애물 코스까지, 눈과 귀를 사로잡는 볼거리가 끊이지 않는다. 거대한 스케일의 연출 외에도 가만히 들여다보게 만드는 섬세한 디테일들 역시 감탄을 자아낸다. 영웅들이 두른 망토의 직물 질감, 플라스틱 미니 피규어 머리의 긁힌 자국을 따라 흘러내리는 빗방울, 오토바이를 탈 때 바람 빠진 풍선 인형처럼 팔을 허우적거리는 배트맨의 모습 등이 그렇다. 오픈 월드 고담 시를 누비는 재미도 환상적이다. 30종의 탑승물은 저마다 조작감이 확실히 구분된다. 특히 영화 '다크 나이트'에 등장했던 전차 같은 '텀블러'의 묵직한 무게감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파괴 가능한 도시의 장식물들을 부수고 다니며 그 안에서 쏟아지는 재화를 쓸어 담기에 이보다 더 완벽한 차량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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